조선 후기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누군가는 그를 무너져가던 조선을 다시 세우려 했던 강력한 개혁가라고 평가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쇄국정책으로 시대의 변화를 막아버린 보수적인 권력자라고 말합니다. 실제 흥선대원군은 단순히 개혁가나 독재자 같은 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세도정치로 흔들리던 조선을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누구보다 강하게 움직였고,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권력자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빠르게 변해가던 세계 질서를 끝내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한계 역시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역사책에서 처음 흥선대원군을 배웠을 때는 솔직히 쇄국정책만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나라 문을 닫은 사람”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상황과 흥선대원군의 정책들을 다시 살펴보니, 단순히 시대를 거스른 인물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조선 내부는 세도정치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외부에서는 서양 열강과 일본이 동아시아 질서를 빠르게 바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어떻게든 다시 바로 세우려 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생애, 몰락한 왕족에서 권력 중심으로 올라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조선 왕실 종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족 출신이었지만 당시 왕실의 상황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안동 김 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왕권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왕이 존재하더라도 실제 권력은 특정 세도가문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왕실 종친들조차 정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역시 젊은 시절에는 정치적으로 큰 힘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무능한 척 행동하며 세도가문의 경계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왕족이라 하더라도 권력 욕심을 드러내는 순간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선택을 했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 계기는 철종의 죽음이었습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고, 이하응은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바로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입니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겨우 12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 국정 운영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맡게 되었고, 그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개혁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은 국가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관리 임명은 부패했고, 백성들의 삶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세도정치 개혁과 서원 철폐, 조선을 다시 세우려 했던 정책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원 철폐입니다. 당시 전국에는 수백 개의 서원이 존재했는데, 많은 서원이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도 지방 양반 세력의 정치적 기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서원은 학문 연구와 교육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면세 특권과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장소로 변질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진정으로 필요한 서원만 남기고 정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철폐를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상당수 서원이 정리되었고, 국가 재정 확보와 지방 세력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교육기관 개편이 아니라, 오랫동안 특권을 유지해 온 양반 세력을 직접 건드린 강력한 개혁 정책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존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이 군역과 세금 의무에서 사실상 자유로운 경우가 많았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런 특권 구조를 일부 손보려 했던 것입니다. 신분 질서가 강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정책이 긍정적으로만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경복궁 중건 사업은 지금까지도 평가가 갈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왕권을 상징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 재건을 추진했지만,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노동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원납전 강제 징수와 당백전 발행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으로 이어졌고, 물가 상승 같은 경제 혼란도 발생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매우 강한 방식으로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실제로 단기간 안에 세도가문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백성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점 역시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은 왜 쇄국정책을 선택했을까
흥선대원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쇄국정책입니다. 그는 서양 세력이 조선에 접근하는 것을 매우 위험하게 바라봤습니다. 특히 천주교 확산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병인박해를 통해 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병인양요가 발생했고, 이후 미국 함대가 조선을 공격한 신미양요 역시 이어지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외세와의 화친을 강하게 경계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쇄국정책은 시대 흐름을 거부한 선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함께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그 시기 서양 열강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식민지화하고 있었고, 청나라 역시 서양 세력의 압박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이 외세에 휘둘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최대한 문을 닫고 내부를 정비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만 세계는 이미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시작하고 있었고, 서양 국가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결국 이런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후 외세 압박 속에서 점점 흔들리게 됩니다. 저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보면서 단순히 “틀린 선택이었다”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외세를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 판단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흐름을 조금 더 빠르게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미래 역시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명성황후와 권력 갈등,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몰락
고종이 성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권력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명성황후 민씨 세력이 정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갈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강한 왕권 중심 정치를 원했지만, 명성황후와 민 씨 세력은 개화 정책과 새로운 외교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정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권력 복귀를 시도하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임오군란 당시 다시 잠시 권력을 잡기도 했지만, 청나라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1898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조선이 외세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조선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강하게 움직였던 인물이었지만, 결국 조선은 그가 바라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실패한 인물이었을까
흥선대원군을 바라보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분명 그는 조선을 바꾸기 위해 실제 행동에 나섰던 인물이었습니다. 세도정치를 정리하려 했고,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려 했으며, 외세의 침략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처했던 혼란을 생각하면 이러한 움직임 자체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의도만으로 결과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강력했지만 동시에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던 세계 질서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던 점은 결국 조선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을 단순히 성공한 개혁가나 실패한 권력자 가운데 하나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는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 조선을 지켜보려 했던 마지막 강한 권력자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복합적인 모습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을 계속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흥선대원군'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