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서원을 47곳만 남기고 철폐한 사람과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 사람은 모두 흥선대원군입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과 지방 유림의 특권을 줄인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 반면 척화비는 서양과의 화친과 통상을 나라를 파는 행위로 규정하며 대외정책의 선택지를 좁힌 상징이었습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흥선대원군 정치의 성과와 실패가 함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도정치 세력을 약화하고 호포제와 사창제를 시행했으며,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정비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이 정도로 빠르게 기득권을 제압하고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한 권력은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방향보다 왕실과 중앙 권력을 복원하는 데 집중됐습니다. 외세와 충돌한 뒤에는 서양의 힘을 분석하고 대응 체제를 만드는 대신 통상 거부를 더욱 확고하게 선언했습니다. 권력에서 물러난 뒤에도 새로운 개혁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복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멸망시킨 유일한 인물은 아닙니다. 조선의 몰락에는 오랫동안 누적된 사회적 모순과 이후 정부의 실책, 외세의 침략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직접적인 책임도 일본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흥선대원군을 조선 몰락의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으로 봅니다. 국가를 바꿀 권력과 시간을 얻고도 국제정세를 결과적으로 크게 오판했고, 그로 인해 근본적인 개혁의 기회까지 놓쳤기 때문입니다.

개혁은 특권을 줄였지만 권력의 중심만 바꿨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한 뒤 흥선대원군은 약 10년 동안 국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정치 세력을 약화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의정부와 삼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군사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지방에서는 47개의 사액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당시 일부 서원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고 세금과 군역을 면제받았습니다. 지방 백성에게 각종 부담을 떠넘기며 유림과 토호의 권력 기반으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서원 철폐는 백성에게 피해를 주던 특권을 줄이고 지방 세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높인 정책이었습니다. 호포제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기존 군역제도에서는 일반 백성에게 부담이 집중됐지만, 호포제는 사족층까지 과세 대상에 포함했습니다. 다만 호포제를 현대적인 신분 평등 정책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양반과 일반 백성 사이에는 여전히 납부액 차이가 있었고, 기존의 군역과 조세 체제를 완전히 바꾼 제도도 아니었습니다. 양반의 면세 특권을 일부 줄이고 과세 대상을 확대해 국가 재정을 확보한 정책에 가까웠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필요했고 실제 성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종 목적은 백성의 정치적 권리 확대나 새로운 국가 체제의 건설보다 왕권과 중앙정부의 통제력 회복에 가까웠습니다. 흥선대원군 자신도 공식적인 관직이나 섭정 권한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국왕의 생부라는 특수한 지위를 바탕으로 비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세도정치를 끝냈지만, 국왕과의 사적 관계에 의존해 국정을 움직이는 운영 방식까지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득권을 제압할 사람은 바뀌었지만 권력이 특정 인물에게 집중되는 구조는 계속된 셈입니다.
경복궁 중건은 국가의 우선순위를 드러냈다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다시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었습니다. 이를 복원하는 일에는 세도정치로 약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보여준다는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사업 초기에는 조정과 백성 사이에서도 중건의 필요성에 어느 정도 공감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공사의 규모와 재정을 마련한 방식이었습니다. 정부는 원납전을 거두고 백성을 부역에 동원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내는 돈이라는 이름과 달리 원납전은 실제로는 강제적인 부담으로 변했습니다. 도성 문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문세를 걷기도 했습니다. 재정이 부족해지자 당백전도 발행했습니다. 당백전은 기존 상평통보보다 재료 가치가 약 5~6배에 불과했지만 명목상 100배의 가치를 부여한 화폐였습니다. 약 6개월 동안 대량으로 발행되면서 화폐 질서가 흔들렸고 물가가 크게 올랐습니다. 경복궁 중건만이 당백전 발행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군비를 비롯한 국가의 재정 수요도 함께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재정을 무리한 화폐 발행과 강제적인 부담으로 충당하면서 백성의 생활과 경제에 혼란을 일으킨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조선에는 군사력과 재정을 정비하고 외국의 기술과 국제정세를 연구해야 할 과제도 있었습니다. 제한된 자원을 어디에 먼저 사용할지는 국가의 장기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문제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새로운 제도와 국가 역량보다 왕실을 상징하는 거대한 공간을 복원하는 데 많은 자원을 투입했습니다. 경복궁 중건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생각한 국가 재건의 우선순위가 왕권의 상징과 권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위협을 알았던 만큼 오판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흥선대원군을 외부 세계의 변화를 전혀 몰랐던 단순한 쇄국주의자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고 조선과 국경을 맞대자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힘을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흥선대원군도 프랑스가 러시아를 막아 준다면 천주교의 활동을 일부 인정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고, 프랑스 선교사를 통한 교섭 가능성을 검토했습니다. 이는 그가 서양 열강의 존재와 국가 사이의 경쟁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섭은 성사되지 않았고 러시아의 통상 요구도 일시적으로 줄었습니다. 조정 내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반대가 커지자 흥선대원군은 1866년 대규모 탄압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많은 조선인 신자가 처형됐고, 프랑스는 이를 명분으로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에도 대외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은 없었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에서도 미국 함대가 통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물러나자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외국 군대가 철수했다는 사실과 조선의 기존 군사·경제 체제가 서양 열강에 장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는 평가는 구분해야 합니다. 조선군이 침략에 저항했고 즉시 개항을 강요당하지 않았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충돌은 조선이 외국의 무기와 군사력을 직접 확인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그 경험을 외국의 힘을 연구하고 대응 방법을 넓히는 계기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양과의 화친과 통상을 매국으로 규정하며 거부 노선을 국가의 원칙으로 굳혔습니다. 외세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양 열강은 군함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했고, 일본도 이후 조선 침략을 추진했습니다. 문제는 침략에 대한 경계와 외부의 기술·정보·제도를 배우는 일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국제정세를 완전히 몰라서 실패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외부의 위협과 외교적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았지만, 충돌을 경험한 뒤 가장 폐쇄적인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정세 오판에 대한 책임도 가볍게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닫힌 문보다 더 큰 문제는 준비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서양 열강의 무력 요구를 거부하며 조선에 시간을 벌어 주었다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그의 집권기에는 서양 국가와 정식 통상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해안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군사기구를 개편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벌었다는 평가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 시간에 다음 위기를 감당할 능력을 마련해야 합니다. 조선은 외국의 군사기술과 산업력을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새로운 국제질서에 맞는 외교 체제를 충분히 만들지 못했습니다. 재정과 군사제도의 개편도 기존 체제를 보완하는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문을 열지 않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을 닫고 있는 동안 개항 이후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1876년 무력을 배경으로 강화도조약을 강요했습니다. 강화도조약 체결의 직접적인 책임은 당시 조선 정부와 조약을 강요한 일본에 있습니다. 이미 실각한 흥선대원군에게 조약 체결 자체의 책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의 집권기에 조선이 변화한 일본과 서양 열강에 대응할 국가 역량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별개의 평가 대상입니다. 흥선대원군은 통상 거부로 시간을 확보했을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조선의 체질을 바꾸는 데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공식 역사 교육 자료에서도 그의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가로막고 근대적 변화가 늦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합니다.
실각 뒤에도 정책보다 권력 복귀가 앞섰다
1873년 최익현은 경복궁 중건과 재정정책, 서원 철폐 등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문제를 비판하고 그가 국정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종이 최익현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흥선대원군은 권력에서 물러났고 고종의 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이후 자신의 정책을 잘못이라고 인정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국제정세를 오판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외면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각 이후의 행동을 보면 자신의 경험을 다음 정부의 개혁에 보태기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1882년 구식 군인과 도시 하층민의 불만이 폭발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군란은 밀린 급료와 차별 대우, 부정부패, 급격한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등 여러 원인이 결합해 발생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군란을 계획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그에게 사태 수습을 맡기자 그는 다시 정치권력의 중심에 섰습니다. 재집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흥선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했고, 그는 불과 한 달가량 만에 다시 권력을 잃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 내정 간섭은 더 강해졌습니다. 이 모든 결과를 흥선대원군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국가가 외세의 압력과 개혁 문제로 흔들리던 시기에 그가 다시 권력투쟁의 중심에 들어간 것은 혼란을 줄이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위해 복귀했는지는 내면의 문제이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실각 이후 보여준 행동은 새로운 국가 운영 방안을 제시하는 개혁가보다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정치가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성과보다 놓친 기회를 봐야 한다
흥선대원군의 모든 정책을 실패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원 철폐는 지방 양반의 특권을 줄였고, 호포제는 양반층까지 과세 대상에 포함했습니다. 세도정치 세력을 약화하고 행정 질서를 회복하려 한 시도도 필요했습니다. 외국의 무력적인 통상 요구에 즉시 굴복하지 않은 태도 역시 주권을 지키려는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평가는 개별 정책의 의도와 숫자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권력과 국가의 자원을 어느 방향에 사용했는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흥선대원군에게는 양반과 유림의 반발을 제압할 힘이 있었습니다. 기존 정치기구를 바꾸고 새로운 정책을 전국에 시행할 추진력도 있었습니다. 외국 군함과 무기를 직접 보며 세계의 변화가 조선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개혁은 왕권과 중앙 통제력 회복을 넘어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드는 단계로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위해 경복궁을 복원했지만 민생과 재정에 큰 부담을 줬습니다. 외세의 침입을 막았지만 국제질서의 변화를 학습하고 대응할 체제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실각한 뒤에도 다음 정부의 개혁을 지원하기보다 권력 복귀를 둘러싼 갈등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직접적인 책임은 일본에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후 고종 정부와 여러 정치세력의 실책도 함께 평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흥선대원군은 조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에 가장 강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무능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지도자였다면 책임을 이처럼 크게 평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정책을 실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능력보다 방향이었습니다. 조선에 필요했던 것은 과거의 왕권을 복원하는 데 머무는 지도자가 아니라, 외세의 위협을 정확히 분석하고 국가 전체를 새로운 환경에 맞게 바꾸는 지도자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그 역할을 수행할 권력과 시간을 얻었지만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흥선대원군을 조선을 멸망시킨 유일한 주범이 아니라, 조선이 변화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한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합니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흥선대원군의 정치 개혁」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원군의 내정 개혁과 대외정책」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경복궁 중건」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척화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흥선대원군」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임오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백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오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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