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단서는 그녀를 묘사한 말보다 그 말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바뀌었는가에 있다. 일본의 관변 언론이었던 『한성신보』는 처음부터 명성황후를 일관되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개항과 개화정책을 일본의 도움으로 이룬 변화라고 선전하던 시기에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개국에 우호적인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간섭 이후 조선 왕실이 러시아에 접근하고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구상이 흔들리자 논조가 달라졌다. 명성황후는 민씨 일족의 부패와 매관매직, 무속 신앙을 조종하는 인물로 부각됐다. 을미사변 전후에는 국왕의 판단을 흐리고 조선을 혼란에 빠뜨린 존재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훗날 한국의 뮤지컬과 드라마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명성황후는 일본에 맞서 조선을 지키다 희생된 국모이자 항일 영웅으로 형상화됐다. 한쪽에서는 나라를 망친 악녀가 됐고, 다른 쪽에서는 나라를 홀로 지키려 한 영웅이 됐다. 나는 이 두 이미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명성황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각 이미지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무엇을 강조하는 대신 어떤 책임을 보이지 않게 했는가이다.

평가는 을미사변을 전후해 달라졌다
명성황후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가 모두 일본에 의해 새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조선 사회에도 민씨 척족의 성장과 관리들의 부패, 왕실의 인사 개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조선의 정치가 불안정했고, 관직과 이권을 둘러싼 문제가 존재했다는 사실까지 일본의 선전이라고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제 문제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고 확대해 보도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한성신보』는 조선 사회에서 떠돌던 매관매직과 무속 관련 소문을 적극적으로 전달하면서 명성황후를 부패의 중심에 놓았다. 특히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진 시점부터 왕실에 대한 평가가 급격히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명성황후가 같은 행동을 했는데도 일본의 정책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개국에 우호적인 왕비로 평가되고, 일본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떠오르자 부패한 악녀로 묘사됐다면 그 평가는 순수한 인물 비평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 이미지는 일본이 조선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정치적 언어이기도 했다. 조선은 스스로 개혁할 수 없는 나라이고, 국왕은 무능하며, 왕비와 그 친족은 부패했다는 구도가 만들어지면 일본의 간섭은 침략보다 혼란을 바로잡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었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악녀 이미지를 검토할 때는 내용뿐 아니라 그 평가가 강화된 시점과 평가를 퍼뜨린 주체의 이해관계를 함께 봐야 한다.
기록 속 명성황후는 정치에 관여한 왕비였다
일본의 왜곡을 비판한다고 해서 명성황후를 정치와 무관한 피해자로 바꿔서는 안 된다.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에는 왕실의 안부와 가족 이야기에 더해 관리의 인사와 정사에 관여한 정황이 나타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이 편지들을 당시 궁중의 상황과 함께 명성황후가 인사와 정사에 관여한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한다. 그녀는 고종 옆에서 궁중 의례만 담당한 수동적인 왕비가 아니었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협력자로 활동했고, 척족 인물들을 규합해 대원군 세력에 맞섰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도 왕실의 권력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키려 했다. 일본의 압력이 강해진 뒤에는 러시아에 접근해 일본을 견제하고 군주권을 회복하려 했다. 이러한 행동을 모두 애국이나 개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명성황후의 선택에는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목적뿐 아니라 왕실과 군주권,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지위를 보존하려는 목적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친족과 가까운 인물의 등용이 공정했는지, 특정 인맥의 성장이 국정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다만 명성황후 개인의 책임과 친족 또는 관료들의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 민씨 성을 가진 관료가 부패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동을 모두 명성황후가 지시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반대로 명성황후가 왕비였다는 이유로 인사 개입과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책임을 전혀 묻지 않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기록이 보여주는 명성황후는 아무런 권한 없이 희생된 왕비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국정에 참여한 정치적 행위자였다. 따라서 그녀의 정치는 구체적인 결정과 결과를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악녀 서사는 정치 비판을 책임 전가로 바꾸었다
명성황후의 정치를 비판하는 것과 을미사변을 설명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그러나 일본 측의 일부 보도와 후대 저술에서는 두 문제가 하나의 인과관계처럼 연결됐다. 명성황후가 부패했고 대원군과 권력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궁중의 충돌이 격화됐으며, 그 과정에서 살해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설명이다. 이렇게 서술하면 을미사변은 일본 공사와 군대가 조선의 왕궁을 공격한 사건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오랜 내분에서 발생한 비극처럼 보이게 된다. 사건 현장에 참여했던 『한성신보』 관계자 일부는 이후의 저술에서도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을 설명했다. 미우라 고로 역시 대원군이 사건을 주도했고 일본 측은 이미 상황이 끝난 뒤 궁궐에 도착한 것처럼 주장했다. 이러한 설명에서 명성황후의 악녀 이미지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살해된 사람이 조선을 혼란에 빠뜨린 부패한 권력자였다면, 살해 행위 자체보다 그녀가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심이 집중된다. 일본의 행동은 범죄의 원인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혼란에 뒤늦게 개입한 일처럼 축소된다. 명성황후에게 정치적 책임이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이런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부패한 정치인을 비판하고 권력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과, 외국의 공사와 군대가 왕궁에 침입해 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잘못이 확인되더라도 그것은 일본 측 실행자들에게 살해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악녀 서사의 가장 큰 문제는 명성황후를 불쾌한 인물로 묘사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조선 내부 정치의 문제를 일본이 저지른 폭력의 원인으로 바꾸면서, 사건의 책임이 향해야 할 방향을 흐렸다는 데 있다.
을미사변에서 확인되는 책임과 확인되지 않는 지시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일어난 을미사변을 단순히 일본 낭인들의 범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사건 당시 일본 측 최고 책임자는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가 주요 무력으로 동원됐고, 일본 공사관원과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들이 행동대에 참여했다. 이들은 경복궁에 침입해 당시 왕후였던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따라서 을미사변은 통제되지 않은 민간인 몇 사람이 저지른 우발적 범죄가 아니라 일본 공사와 일본군을 중심으로 한 공권력 집단이 실행한 사건으로 봐야 한다. 다만 일본 정부 최고위층이 명성황후 살해를 구체적으로 명령한 문서가 현재 명백하게 확인됐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일본 정부는 사건을 미우라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처리하려 했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일본 정부 수뇌부가 계획을 어디까지 사전에 알았는지, 방조하거나 묵인했는지를 두고 논의가 이어져 왔다. 사건이 은밀하게 추진됐고 일본 측이 사건 뒤 자료를 인멸하거나 왜곡했기 때문에 전체 지시 체계를 완전히 복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최고위층의 직접 명령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본의 책임이 불분명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공사가 지휘했고 일본군과 공사관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사건 뒤 일본은 관련자들을 자국으로 데려가 재판했지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면소했다. 일본 정부가 사건을 대원군과 조선군의 범행으로 돌리려 했다는 자료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확인되는 범위는 분명하게 쓰고, 확인되지 않는 부분은 그 한계를 밝혀야 한다.
-미우라와 일본 공사관을 중심으로 한 실행 책임은 확인된다.
-일본군이 주요 무력으로 참여한 사실도 확인된다. 사건을 조선 내부의 정쟁으로 위장하려 한 시도 역시 확인된다.
-일본 정부 수뇌부의 구체적인 명령 경로는 단일한 결론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배후의 모든 세부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이미 확인된 실행 책임까지 낭인의 개인 범죄로 줄이는 것은 역사적 신중함이 아니라 책임의 축소다.
영웅화가 되찾은 것과 놓친 것
후대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진 명성황후의 영웅 이미지를 일본의 악녀화와 똑같은 성격의 왜곡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두 이미지는 형성된 위치와 목적이 다르다. 일본 측의 악녀화는 가해 세력의 침략과 살해 책임을 흐리는 데 이용됐다. 반면 한국의 영웅화는 훼손된 희생자의 존엄을 회복하고 을미사변을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1995년 을미사변 100주기를 전후해 명성황후를 다룬 뮤지컬과 문화콘텐츠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녀는 일본에 맞선 국모로 강하게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는 오랫동안 일본 측 기록과 야사에 의해 굳어진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웅화에는 한계가 있다. 명성황후의 모든 외교적 선택을 자주독립을 위한 치밀한 전략으로 설명하거나, 그녀를 조선의 근대화를 홀로 이끈 지도자로 묘사하면 실제 정치의 복잡성이 사라진다. 러시아에 접근한 선택에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다른 외세의 힘을 빌려 왕실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성격도 있었다. 인사와 정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면 그 결과에 대한 정치적 평가도 피할 수 없다. 명성황후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과 그녀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명성황후를 둘러싼 악녀와 영웅의 이미지를 같은 무게로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악녀화는 가해 책임을 조선 내부로 돌리는 데 사용됐고, 영웅화는 침략의 피해자를 기억하고 존엄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두 이미지가 지닌 역사적 책임은 분명히 다르다. 다만 어느 쪽이든 한 인물을 하나의 역할로 고정하면 중요한 사실이 사라진다. 악녀 이미지는 일본 공사와 군대가 왕궁에 침입해 왕비를 살해한 책임을 흐렸다. 영웅 이미지는 명성황후가 실제 권력을 행사한 정치인이었으며, 그 선택 역시 평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약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명성황후에 관한 질문은 악녀와 영웅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인가로 끝나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 이미지를 누가 만들었으며, 그 이미지가 어떤 책임을 드러내고 어떤 책임을 감추었는가. 명성황후의 인사 개입과 권력 운영은 그녀가 실제로 내린 선택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을미사변은 미우라와 일본 공사관, 일본군을 중심으로 한 실행 주체의 책임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두 문제를 섞으면 한쪽에서는 살해의 가해자가 정치적 비판 뒤로 숨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가의 선택이 비극적인 죽음 뒤로 사라진다. 명성황후를 제대로 기억한다는 것은 새로운 영웅상을 만드는 일도, 오래된 악녀상을 되풀이하는 일도 아니다. 각각의 행동에 책임을 정확히 돌려주는 일이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성황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성황후 언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미사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갑오개혁과 을미사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장영숙, 「『한성신보』의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과 평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3, 2017
-김응교, 「‘명성황후’의 문화콘텐츠와 역사읽기」, 『한국문화연구』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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