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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물

정조의 화성 계획: 천도설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정치공간

by 인물로 읽는 한국사 2026. 5. 4.

정조의 화성 천도설

정조가 수원 화성으로 조선의 수도를 옮기려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화성의 거대한 성곽과 행궁, 친위군 배치, 신도시 조성 사업을 보면 정조가 한양을 떠나 수원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려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조선의 수도가 수원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가 한양을 폐지하고 화성으로 수도를 완전히 옮기기로 확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화성의 위상을 두고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정조가 장차 상왕으로 머물 별도의 왕실 도시를 구상했다는 연구가 있고, 한양과 화성을 연결한 일종의 양경 체제를 계획했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화성의 지위는 수도가 아니라 유수부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세 가지를 구분하려 한다. 첫째, 정조가 화성에 행궁·행정기관·친위군·성곽·상업 기반을 집중시킨 사실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둘째, 이를 상왕이 거주하는 별경이나 양경제 구상으로 보는 것은 연구자들이 제시한 해석이다. 모든 연구자가 합의한 확정된 결론은 아니다. 셋째, 나는 화성을 한양을 즉시 대체할 새 수도라기보다, 한양 밖에서도 국왕의 통치가 직접 작동하도록 만든 또 하나의 정치공간으로 본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정치공간’은 당시의 공식 명칭도, 학계의 정설도 아니다. 화성에 결합된 여러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이 글에서 사용하는 나의 해석이다.

 

 

화성은 성곽보다 먼저 만들어진 도시였다

수원 화성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성벽과 성문이 떠오른다. 그러나 정조의 화성 계획은 성곽 축조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1789년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했다. 새 묘역이 원래 수원 읍치와 가까웠기 때문에 기존 관아와 주민들의 생활공간을 팔달산 아래로 옮겨 새로운 읍치를 조성했다. 정조는 단순히 주민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새 읍치에 관아와 행궁을 짓고, 주민들이 정착해 생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시 기반을 마련했다. 1793년에는 수원부의 이름을 화성으로 바꾸고 유수부로 승격했다. 이듬해인 1794년부터 본격적인 성곽 공사가 시작됐고, 화성은 1796년에 완성됐다. 순서를 보면 성곽은 새 도시를 처음 만든 시설이 아니었다. 먼저 현륭원이 들어서고, 기존 읍치가 옮겨지고, 행궁과 관아가 세워졌다. 그 뒤 도시의 행정적 지위가 높아졌으며 마지막 단계에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성곽이 건설됐다. 이 과정은 화성이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기 위한 성곽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륭원 이전은 화성 건설의 출발점이었지만, 정조가 실제로 만든 것은 묘역을 둘러싼 작은 고을이 아니라 주민·관청·군대·시장이 함께 존재하는 새로운 도시였다.

 

유수부·행궁·장용외영이 한 곳에 모인 이유

1793년 정조가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하면서 화성의 행정 구조도 달라졌다. 화성유수는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용외사와 행궁정리사를 겸했다. 한 사람이 화성의 행정, 군사, 행궁 관리를 함께 책임지는 구조였다. 정조의 친위군인 장용영도 한양의 내영과 화성의 외영으로 나뉘었다. 장용외영은 화성과 행궁, 현륭원을 방어했으며 주변 지역의 군사력까지 연결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잠시 쉬는 숙소만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화성유수부의 관청으로 사용됐고, 정조가 방문하면 국왕과 수행 인원이 머무는 궁실이 됐다. 행정기관과 군영, 국왕이 머무는 공간이 한 곳에 결합된 것이다. 정조는 화성을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이 지역이 현륭원을 보호하는 관방으로서 중요하며, 행궁을 관리하는 업무를 일반 지방관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밝혔다. 화성을 평범한 지방 고을과 다르게 취급하고 있었음을 직접 보여주는 기록이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에서도 이 도시의 복합적인 기능이 나타났다.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하고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동시에 군사훈련을 지켜보고 과거를 시행했으며,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고 도시 건설 상황을 확인했다. 효도와 추모의 행차이면서 국왕의 군사력과 행정 능력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러한 기능을 보면 화성을 단순히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한 도시라고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정조는 화성에서 왕실 의례를 행하면서 군대를 지휘하고 관리를 선발하며 지방 행정을 점검할 수 있었다. 한양 밖에서도 국왕의 여러 역할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사람이 살아야 정치공간도 유지된다

성곽과 관청만 세운다고 도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읍치가 유지되려면 주민이 정착하고, 집을 짓고, 시장을 열고,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정조는 대신과 지방관들에게 화성을 번영시킬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초기에는 서울의 부유한 상인들을 화성으로 이주시켜 자금을 빌려 주고 상업을 일으키자는 방안도 제시됐다. 이 계획은 서울 상권이 약해질 수 있다는 반대에 부딪혀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후 수원부사 조심태는 외부의 부유한 상인을 데려오기보다 기존 수원 주민들의 생업과 경제적 기반을 먼저 키우는 부양책을 제시했다. 정부는 건축과 정착을 지원하고 시장과 상품 유통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화물 운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수원 지역에서 수레 사용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농업 생산과 군량 확보를 위해 저수지와 둔전도 조성됐다. 이러한 조치는 정조가 화성을 빈 성곽이나 왕실 전용 공간으로 남겨 두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군대와 관청이 계속 유지되려면 식량과 물자가 필요했다. 국왕이 반복해서 방문하고 대규모 행사를 열기 위해서도 교통과 시장, 주민의 노동이 뒷받침돼야 했다. 화성의 경제정책을 모두 백성을 위한 이상적인 복지정책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신도시와 성곽 건설에는 전국의 재정과 인력이 투입됐다. 도시 주민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지만 국가의 대규모 사업을 감당해야 하는 비용도 있었다. 화성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공간인 동시에 국왕의 군사·행정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다만 화성 축조 과정에서는 참여한 장인과 노동자, 물자의 종류와 가격, 지급된 품삯이 상세히 기록됐다. 이는 정조가 단순히 성곽의 결과만이 아니라 공사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정조의 화성 계획에서 주민과 경제정책은 부수적인 장식이 아니었다. 정치공간이 지속되기 위한 실제 기반이었다.

 

화성천도설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화성이 평범한 지방도시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정조가 수도 이전을 확정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정조가 화성에 투입한 시설과 국가 역량은 분명 특별했다. 화성에는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유수부, 국왕이 머물 행궁, 친위군인 장용외영, 상업과 농업 기반, 대규모 성곽이 마련됐다. 정조는 현륭원 이전 이후 여러 차례 화성을 찾았고 도시 건설을 직접 점검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일부 연구자는 정조가 화성을 장차 상왕이 거주할 별경으로 계획했다고 본다. 최성환은 화성을 단순한 유수부보다 높은 위상의 별경으로 구상했으며, 정조가 왕위를 후계자에게 넘긴 뒤 화성에 거주하면서 한양과 화성을 오가는 양경제를 계획했다고 해석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도 정조의 잦은 화성 행차를 상왕이 거주할 도시의 건설과 연결한다. 그러나 이것은 연구를 통해 제시된 주장이다. 정조가 공식적으로 한양을 폐지하고 조선의 수도를 화성으로 완전히 이전한다고 선포했다는 뜻은 아니다. 화성의 공식 행정 지위도 유수부였다. 따라서 다음 세 문장은 서로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정조가 화성을 일반적인 지방도시보다 특별하게 조성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정조가 장차 상왕으로 화성에 머물 계획이었다는 것은 여러 자료를 근거로 제시된 연구 해석이다.

-정조가 조선의 수도를 한양에서 화성으로 완전히 옮기기로 확정했다는 주장은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화성이 실제 별경이나 제2의 수도가 됐을지는 확인할 수 없다. 역사는 실현되지 않은 계획을 결과처럼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화성은 수도의 대체가 아니라 통치공간의 확장이었다

나는 화성의 의미를 천도 계획의 성공과 실패로만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조가 한양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이었는지 확정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화성에 새로운 정치적 기능을 집중시켰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양에는 오랜 관청과 궁궐, 군영, 정치세력의 관계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반면 화성은 정조가 읍치의 위치부터 행궁, 군영, 성곽, 시장과 교통까지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도시였다. 국왕이 기존 도시의 일부 제도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한 기능들을 한 공간 안에 다시 배치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점에서 화성을 한양 밖에 만든 또 하나의 정치공간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화성의 공식 명칭이나 학계 전체의 합의가 아니다. 화성의 여러 기능을 연결해 보면서 내가 내린 판단이다. 정조는 화성에 행차해 선왕을 추모하고 어머니에게 효를 행했다. 동시에 군대를 사열하고 관리를 선발하며 주민을 만나고 도시의 행정과 경제를 점검했다. 화성에서 효도와 왕권 강화, 군사 개혁, 지방 행정, 도시 경제는 서로 분리된 사업이 아니었다. 한 장소에서 함께 작동했다. 이 때문에 화성은 정조의 여러 업적 가운데 하나라기보다, 정조가 국왕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공간으로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정조가 생각한 개혁은 반드시 정치적 권력을 여러 집단에 나눠 주는 일이 아니었다. 유능한 국왕이 군사·행정·경제를 직접 살피고 조정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화성은 그러한 통치 방식의 가능성을 한양 밖에서 시험한 도시였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고 화성을 정조의 완성된 이상국가라고 미화할 수도 없다. 화성의 행정과 군사체계는 국왕 개인의 관심과 권위에 크게 의존했다. 도시 건설에는 막대한 국가 재정과 노동이 필요했다. 정조가 구상한 정치공간이 주민들에게 언제나 같은 이익을 주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조는 성곽 하나만 남긴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정착하고 시장이 움직이며, 지방관과 친위군이 배치되고, 국왕이 의례와 군사·행정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었다. 화성천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만 묻는다면 정조가 실제로 만든 것의 상당 부분을 놓칠 수 있다. 화성의 더 중요한 의미는 수도 이전이 실현됐는가에 있지 않다. 정조가 한양 밖에 새로운 도시를 설계하고, 그곳에 국왕의 통치를 구성하는 여러 기능을 다시 결합했다는 데 있다.

 

[참고]

-『정조실록』 정조 17년 1월 12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수원 화성 건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화성 건설과 함께 성장한 수원의 장시」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장용영의 설치」

-『화성성역의궤』

-최성환,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 시 활동과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76, 2016

-최성환, 「정조대 수원 화성 신도시의 위상과 별경 구상」, 『역사교육』 15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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