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정안군 이방원과 형 이방간이 각자의 군사를 동원해 충돌했다. 제2차 왕자의 난이었다. 승리한 이방원은 정종의 왕위 계승자로 책봉됐고, 같은 해 태종으로 즉위했다. 그 사이 이방원은 왕자와 공신들이 거느리던 사병을 없애는 조치를 추진했다. 자신을 승리하게 한 힘을 권력을 장악한 뒤 제거한 것이다. 나는 사병 혁파의 직접적인 목적이 다른 왕자와 공신의 무력을 빼앗아 이방원의 권력을 지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발점이 권력 보호였다고 해서 사병을 없앤 결정까지 잘못됐다고 볼 수 있을까.

사병은 단순한 개인 경호원이 아니었다
조선 건국 직후의 사병은 왕자와 공신 같은 유력자가 자신의 지휘 아래 거느리던 무력 기반이었다. 정치적 갈등이 생기면 실제 전투에 동원됐고, 왕위 계승과 정권의 향방까지 바꿀 수 있었다. 이방원도 사병을 이용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과 세자 이방석 측을 제거했고, 1400년에는 사병을 동원한 이방간의 세력을 제압했다. 왕자와 공신이 각자 군사를 거느리는 상태에서는 정치적 대립이 언제든 무력 충돌로 번질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은 사병이 단순한 경호 조직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 질서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방원은 왜 자신이 이용한 힘을 없앴을까
권력을 얻기 전 사병은 이방원이 경쟁자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자가 된 뒤에는 같은 제도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으로 바뀌었다. 이방간이 군사를 동원해 맞섰던 것처럼, 다른 왕자나 공신도 독자적인 병력을 가진다면 새로운 정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이러한 인식이 직접 드러난다. 이방원은 자신과 형제들이 군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상황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박포가 이방간을 부추길 수 있었던 것도 이방간에게 병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병권은 여러 사람에게 흩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기록은 이방원이 사병의 효과와 위험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신에게는 권력을 얻는 힘이었지만, 승리한 뒤에는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렇다고 사병을 그대로 두는 편이 더 나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력자들이 각자의 군대를 유지했다면 왕위 계승이나 정치적 갈등이 생길 때마다 무력이 동원될 위험도 계속 남았을 것이다. 이방원의 권력 보호와 조선의 정치적 안정에 필요한 변화가 같은 방향을 향했던 셈이다.
사병 혁파는 태종 즉위 전에 공식화됐다
사병 혁파는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 처음 시행한 정책이 아니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정종 재위 중에 일어났다. 이방원이 왕위 계승자로 책봉된 뒤인 1400년 4월 사병 혁파가 공식화됐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같은 해 11월이었다. 왕자와 공신들이 지휘하던 군사와 병마는 삼군부를 비롯한 중앙 군사 체계로 귀속됐다. 군대가 특정 인물의 명령보다 국가의 지휘를 받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사병을 넘기지 않거나 혁파에 반발한 일부 공신에게는 유배와 파직 같은 처벌도 뒤따랐다. 다만 이를 현대적인 공공 군대의 탄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국왕이 국가 권력의 중심이었던 조선에서 군사력의 국가 귀속은 병권이 국왕에게 집중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병 혁파는 개인의 무력을 공적인 지휘 체계로 옮긴 제도 개혁이면서, 이방원의 경쟁자들이 무력으로 도전할 가능성을 제거한 권력 재편이었다.
사병 혁파는 태종의 통치 방식과 어떻게 이어졌을까
사병 혁파만 놓고 보면 이방원이 경쟁자들의 군대를 빼앗은 사건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통치까지 보면, 이는 분산된 권한과 자원을 중앙에 집중하려 한 태종의 통치 방향과도 연결된다. 태종은 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를 강화했고, 호패법을 통해 인구와 신분을 파악해 군역과 부역을 운영할 기반을 마련했다. 이 제도들이 사병 혁파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지만, 군사력과 행정권, 인적 자원을 중앙에서 파악하고 국왕이 최종적으로 통제하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태종의 통치를 권력욕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유사한 혼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가의 운영 방식을 제도로 정비했다. 반면 그 안정은 권력을 여러 세력에 고르게 나눈 결과가 아니었다. 주요 권한과 최종 결정권을 국왕에게 모은 결과에 가까웠다.
자신이 이용한 길을 다음 사람에게 막다
이방원은 무력을 이용해 경쟁자를 제거한 뒤, 다른 왕자와 공신에게는 같은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신은 사병으로 기존 질서를 바꿨지만 승자가 된 뒤에는 그 길을 제도로 폐쇄했다. 이 행동에는 분명한 모순이 있다. 그러나 그 모순만으로 사병 혁파가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개인과 가문의 군대를 중앙 군사 체계에 편입한 것은 정치적 대립이 무력 충돌로 번지는 구조를 줄였다는 점에서 필요한 변화였다. 나는 이방원이 사병을 없앤 선택 자체는 옳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권력을 얻은 과정과 제도를 바꾼 뒤 차지한 위치까지 공정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방원은 자신이 권력을 얻은 길을 다음 사람에게는 제도로 막았다. 그 모순은 남았지만, 바로 그 제도를 통해 왕자와 공신의 군대가 반복해서 왕위를 흔드는 구조도 약해졌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 정종 2년 4월 6일 사병 혁파 관련 기사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 정종 2년 6월 20일 병권 관련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병 혁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태조·태종대의 왕권 강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조선의 건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2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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