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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물

세조의 보법은 한 집을 어떻게 다시 계산했을까: 호에서 정과 보로 바뀐 군역

by 인물로 읽는 한국사 2026. 6. 26.

1464년 세조 때 마련된 군적 규정에는 “두 명의 정을 하나의 보로 삼는다”는 기준이 등장한다. 여기서 정은 군역 대상으로 파악한 성인 남성을 뜻하고, 보는 두 명의 정을 묶어 만든 군역 편성 단위였다. 토지 5 결을 정 한 명과 같은 것으로 계산하고, 남자 노비도 봉족의 수에 포함한다는 규정도 함께 제시됐다. 이 변화는 군사를 몇 명 늘렸는가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보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실제로 함께 생활하는 집과 가족관계가 군역 부담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보법은 그 집 안에 군역 대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는지를 따로 세고, 필요하면 서로 다른 집의 사람까지 하나의 보로 묶었다. 국가가 군역을 부과하는 기준이 ‘어느 집에 속한 사람인가’에서 ‘군역 단위로 계산할 수 있는 정이 몇 명인가’로 이동한 것이다.

군사 한 명의 뒤에는 그를 돕는 사람이 필요했다

조선 전기의 군역은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군대에 나가는 제도가 아니었다. 직접 복무하는 정군이 있었고, 정군이 복무하는 동안 필요한 비용을 마련해 주는 봉족이 있었다. 봉족은 군역을 면제받은 사람이 아니라 직접 복무하는 대신 정군의 군장과 식량, 이동 비용 등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정군과 봉족을 주로 하나의 호를 중심으로 편성했다. 호 안의 성인 남성 가운데 한 명이 직접 복무하면 나머지 사람이 그의 군역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부족한 경우에는 다른 가구를 함께 묶기도 했다. 정군과 봉족은 아들·사위·조카 등 실제 가족이나 친족관계를 바탕으로 공동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군역은 개인 한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의무라기보다 한 집이 함께 감당하는 부담에 가까웠다. 그러나 실제 가구를 기준으로 하면 집마다 부담이 달라지는 문제가 생겼다. 성인 남성이 여러 명 있는 부유한 집도 하나의 호로 편성될 수 있었고, 성인 남성이 한 명뿐인 가난한 집은 다른 집과 묶여 봉족의 부담을 져야 했다. 같은 수의 사람이 있어도 어느 집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군역 편성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

 

세 집에 여섯 명의 정이 있다면

보법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마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갑의 집에는 군역 대상으로 계산되는 성인 남성이 네 명 있고, 을과 병의 집에는 각각 한 명씩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전의 호 중심 편성에서는 갑의 집이 하나의 자연호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집 안의 사람들이 정군과 봉족의 책임을 함께 지고, 을과 병처럼 인원이 적은 집은 다른 가구와 연결돼 군역 부담을 나눴다. 보법이 적용되면 국가는 먼저 세 집에 사는 여섯 명을 각각 정으로 계산한다. 그다음 두 정을 하나의 보로 묶으면 세 개의 보를 편성할 수 있다. 갑의 집에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하나의 호로만 처리하지 않고, 집 안의 정 수에 따라 여러 보가 나올 수 있었다. 을과 병의 집처럼 정이 한 명씩뿐인 경우에는 서로 다른 가구의 정을 묶어 하나의 보를 만들 수 있었다. 이는 보법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단순화한 예시다. 실제 군적에서는 병종과 재산, 지역의 군사 편성에 따라 누가 직접 복무하고 몇 개의 보를 배정받을지가 달라졌다. 중요한 변화는 가족이 해체됐다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가족관계보다 먼저 인정의 수를 계산하고, 그 숫자를 바탕으로 군역 부담을 다시 조합하기 시작했다.

 

모든 정이 군대로 간 것은 아니었다

두 정을 하나의 보로 묶었다는 설명은 두 사람 모두 직접 군사로 복무했다는 뜻이 아니다. 직접 군역을 담당하는 정군이 따로 있었고, 보는 그 정군의 복무를 지원하는 단위였다. 정군에게 몇 개의 보를 배정할지는 맡은 군역의 종류와 필요한 비용에 따라 달랐다. 갑사처럼 장비와 복무 비용이 많이 필요한 군사는 더 많은 보인을 필요로 했고, 보병이나 그 밖의 군역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보가 배정됐다. 세조 때 마련된 기준은 이후 수정됐으며, 『경국대전』에는 갑사와 기정병·수군 등 병종에 따라 급보 수가 다르게 규정됐다. 따라서 보법은 단순히 군대에 갈 사람을 선발하는 규칙이 아니었다. 군사 한 명을 유지하려면 그 뒤에 몇 명의 지원 인력이 필요한지 정하고, 직접 복무와 경제적 지원을 하나의 군역 체계 안에 배치하는 제도였다.

 

토지와 노비까지 정으로 계산한 이유

세조 때의 보법은 사람의 수만 세지 않았다. 토지 5결을 정 한 명에 준하도록 하고, 남자 노비도 봉족 수에 포함했다. 토지와 노비가 실제로 군대에 간다는 뜻은 아니었다. 국가가 정군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력과 노동력을 군역 편성에 반영하려 한 것이다. 성인 남성이 적더라도 토지를 많이 소유한 집은 군역 비용을 지원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노비를 보유한 경우에도 그 노동력을 집의 경제적 기반으로 계산했다. 이 기준은 군역 부담을 실제 능력에 맞게 나누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자연호만 기준으로 삼으면 성인 남성과 재산이 많은 집이 상대적으로 적은 부담을 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지와 사람을 같은 단위로 환산하는 데에는 한계도 있었다. 같은 5결이라도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이 다를 수 있었고, 토지를 보유한 사람의 실제 생활 형편도 같지 않았다. 노비의 수 역시 군사를 지원할 수 있는 경제력을 정확히 보여주는 기준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한 집의 공동책임은 여러 사람의 의무로 나뉘었다

보법이 시행되면서 한 집에 성인 남성이 많다는 사실은 군역 부담을 정하는 데 더 직접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기존의 호 중심 방식에서는 가족과 친족이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묶여 정군을 지원했다. 보법에서는 한 집 안의 각 정이 별도의 계산 대상이 됐고, 인정이 많으면 그만큼 여러 보를 만들 수 있었다. 반대로 정이 한 명뿐인 집은 다른 집의 정과 함께 보를 구성해야 했다. 이 경우 실제로 함께 살지 않는 사람끼리 정군의 복무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하게 될 수 있었다. 가족과 생활을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국가가 군적에서 묶었기 때문에 책임을 나누는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호 단위에서 인정 단위로 바뀐 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었다. 군역의 책임이 실제 가구에 부과되는 방식에서, 국가가 파악한 개별 장정을 조합해 부과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더 공평한 기준은 왜 다시 수정됐을까

보법은 군역 대상자가 많은 집에 더 많은 부담을 배정하고, 기존 군적에서 빠져 있던 사람을 찾아내는 데 유리했다. 토지와 노비까지 고려했기 때문에 군역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집의 부담을 늘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는 호 중심 편성에서 나타난 불균형을 줄이려는 제도였다. 그러나 자연호와 가족관계를 지나치게 무시하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정군과 보인이 서로 다른 집에 살며 실제 생활을 공유하지 않는 경우, 보인은 자신이 지원해야 하는 정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수 있었다. 정군이 보인에게 규정 이상의 면포나 노동을 요구해도 보인이 이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도 나타났다. 토지를 정으로 환산하는 토지준정 규정 역시 실제 부담 능력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결국 성종 때에는 토지 5결을 정 한 명으로 계산하던 기준이 폐지됐다. 노비를 계산하는 비율도 줄었고, 자연호의 관계를 일부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조정됐다. 보인이 정군에게 제공하는 경제적 지원에도 매달 면포 한 필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을 뒀다. 『경국대전』에 실린 보법은 세조 때 처음 만들어진 규정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를 수정한 결과였다.

 

보법은 군사의 수보다 의무의 주인을 바꾼 제도였다

보법은 보통 세조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으로 설명된다. 군역 대상을 다시 파악하고 군사를 지원하는 체계를 정비했으므로 그런 설명에는 근거가 있다. 보법 시행으로 군역 부담이 이전보다 평준화되고 국가가 파악하는 군액도 크게 늘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나는 보법의 특징을 군사의 숫자만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군역의 책임을 누구에게 귀속시켰는지를 통해 보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법 이전에는 실제 집과 친족관계가 군역 부담을 나누는 기본 틀이었다. 세조 때에는 집 안의 사람을 각각 정으로 세고, 두 정을 하나의 보로 다시 묶었다. 필요하면 서로 다른 집의 사람도 같은 군역 단위에 포함했다. 한 집의 공동책임이 국가가 계산한 여러 인정의 의무로 나뉜 것이다. 이것은 세조나 당시 관료들이 직접 선언한 정치철학이 아니다. 보법의 편성 기준과 이후의 수정 과정을 살펴본 뒤 내린 나의 해석이다. 보법은 백성을 새로 만들어 낸 제도가 아니었다. 이미 마을과 가족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을 군적 위에서 정과 보라는 다른 관계로 다시 배치한 제도였다. 그 순간 한 사람은 어느 집의 아들이나 형제인 동시에, 정군으로 복무하거나 다른 군사를 지원해야 하는 군역 단위가 됐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세조 10년 10월 군적사 휴행사목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보법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호수와 봉족」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군역」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족」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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