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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물

성종은 신하의 비판을 어떻게 통치에 이용했을까: 홍문관과 경연이 만든 정치

by 인물로 읽는 한국사 2026. 7. 5.

왕이 모든 일을 직접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특히 조선처럼 넓은 행정조직을 운영하는 국가에서 국왕은 신하들이 올리는 보고와 상소를 통해 현실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왕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한 대신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의견에 치우친다면 국왕의 판단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성종 시대의 정치를 살펴볼 때 『경국대전』의 완성이나 사림의 등용만큼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서로 다른 의견과 비판이 국왕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성종은 홍문관과 경연을 활용해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고, 대간의 비판도 국정 운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모든 비판을 허용하거나 신하들에게 결정권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성종은 여러 의견을 들은 뒤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디에서 선을 그을지 직접 결정했다. 나는 성종의 정치적 특징을 단순히 훈구와 사림의 균형을 맞춘 데서 찾기보다, 서로 다른 정보와 비판을 왕에게 모으고 이를 통치에 활용한 데서 찾고 싶다. 다만 이것은 성종이 직접 자신의 정치 원칙으로 선언한 내용이 아니다. 성종 재위기의 제도 운영과 구체적인 사건 처리 방식을 살펴본 뒤 내린 개인적인 해석이다.

 

 

어린 성종이 물려받은 조정

성종은 1469년 예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올랐다. 당시 성종은 직접 국정을 이끌기 어려운 나이였기 때문에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것은 1476년이었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고 해서 조정의 권력관계가 한순간에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앙 정치에는 세조와 예종 시대부터 활동한 공신과 원로 대신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국가 운영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고, 왕위 계승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이 이들을 곧바로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성종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존 대신들을 모두 몰아내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정 경험을 활용하면서도, 국왕이 특정 인물이나 집단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통치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 왕이 신하를 통제하는 방법은 명령과 처벌만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신하들이 국왕 앞에서 말하게 만들고, 그 가운데 최종 판단을 국왕이 내리는 것 역시 왕권을 행사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경국대전』은 판단의 공통 기준을 만들었다

성종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경국대전』의 완성과 시행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경국대전』은 성종이 처음부터 혼자 만든 법전이 아니다. 편찬은 세조 때부터 시작됐고, 예종 시대에도 정리 작업이 계속됐다. 성종이 즉위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졌으며, 현재 전해지는 체계는 1485년부터 시행됐다. 성종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새로운 법전을 창조한 데 있지 않았다. 앞선 시기부터 축적된 법령을 정리하고, 국가의 여러 기관이 실제로 따를 수 있는 기준으로 확정한 데 있었다. 법전이 있다고 해서 정치적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과 언관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고, 관청끼리 권한을 두고 충돌할 수도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누구를 처벌해야 하는지 의견이 나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운영의 기준이 법전으로 정리되면 모든 문제를 개인적인 친분이나 공신의 영향력만으로 결정하기는 어려워진다. 신하들은 자신의 주장을 법과 제도에 근거해 설명해야 했고, 국왕도 결정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경국대전』은 갈등을 제거한 법전이 아니라, 갈등을 처리하는 공통 언어를 제공한 제도에 가까웠다. 성종의 정치에서 법은 국왕의 판단을 제한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특정 대신의 말에만 끌려가지 않도록 돕는 통치 수단이기도 했다.

 

홍문관과 경연은 정보를 모으는 공간이었다

성종 시대에는 홍문관의 조직과 기능이 정비됐다. 홍문관은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관이었다. 홍문관 관원들은 경연에도 참여해 유교 경전을 강론했고, 정치 현안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 경연은 겉으로 보면 왕과 신하가 함께 경전을 공부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정 운영과 정치적 판단을 논의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신하들은 경전의 원칙과 과거의 사례를 근거로 정책을 비판할 수 있었다. 국왕은 한 대신의 보고만 듣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료가 제시하는 설명과 반론을 비교할 수 있었다. 성종이 경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단순히 공부를 좋아한 왕이라는 설명으로 끝내기에는 부족하다. 경연은 국왕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통로였다. 어떤 정책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대신들의 이해관계가 어디에서 충돌하는지, 왕의 명령이 유교적 원칙과 맞는지를 신하들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물론 국왕이 모든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경연에서 의견을 들었다고 해서 최종 결정권이 신하들에게 넘어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듣는 구조는 성종이 특정 대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을 넓혀 줬다.

 

비판을 허용하는 것과 권력을 넘기는 것은 다르다

왕이 신하의 비판을 듣는 모습은 때때로 왕권이 약해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에서 비판을 들었다는 사실과 결정권을 포기했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대간과 홍문관 관원들은 왕과 대신을 비판할 수 있었지만, 인사와 처벌, 정책의 최종 결정권은 국왕에게 있었다. 성종은 신하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면서도 그 의견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직접 판단했다. 신하들의 비판은 왕의 권력을 약화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었다. 왕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정책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왕의 입장에서는 비판이 기존 대신들을 견제하는 정보가 될 수도 있었다. 한 대신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특정 인사를 보호하려 할 때, 대간과 홍문관이 이를 비판하면 국왕은 조정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비판은 왕에게 불편한 말이면서 동시에 특정 세력의 독주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다. 성종은 이러한 비판을 완전히 억누르지도, 신하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비판을 듣고 사건을 조사한 뒤 자신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훈구와 사림을 두 개의 정당처럼 볼 수는 없다

성종 시대의 정치는 흔히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설명된다. 훈구는 세조의 집권과 국가 운영에 참여해 공신이 된 인물과 그 주변 세력을 가리키고, 사림은 지방에서 학문적 기반을 쌓은 뒤 중앙 정치에 진출한 관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의 인물들이 오늘날의 정당처럼 정확히 두 조직으로 나뉘어 같은 정책과 목표를 공유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관계와 정치적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따라서 성종이 처음부터 훈구와 사림을 정확히 구분해 두 세력의 균형을 설계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성종 후반으로 갈수록 김종직과 그 문인들을 비롯한 새로운 관료들이 홍문관과 대간에 진출한 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이들은 기존 공신과 대신의 특권과 잘못을 비판했다. 그 결과 기존 대신의 의견만 국왕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고, 다른 관점의 정보와 비판이 왕에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성종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관료들이 하나의 독립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보다, 기존 대신들과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관료들이 조정 안에 존재하게 됐다는 점이었다.

 

임사홍 탄핵은 성종의 판단 과정이 드러난 사건이다

1478년 홍문관과 예문관의 젊은 관료들은 당시 도승지였던 임사홍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사홍이 정치적 관계를 이용해 다른 관료에 대한 탄핵을 움직였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기존 권력자와 젊은 언관들이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성종은 처음부터 상소를 올린 관료들의 주장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핵에 참여한 관원들을 처벌하고 임사홍에게도 조치를 내리는 중간 결정을 했다. 이후 여러 신하를 불러 사건의 경위와 사실관계를 다시 조사했고, 처음 처벌했던 관원들을 복직시켰다. 임사홍에 대한 처분도 이어졌다. 이 사건을 성종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린 왕이었다는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처음에 상소를 올린 관원들까지 처벌한 것은 언론을 위축시키는 결정으로 볼 수 있다. 사건의 핵심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양쪽을 함께 처벌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성종이 자신의 첫 판단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는 추가로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사실관계를 조사한 뒤 처분을 바꿨다. 한 번 내린 왕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정보를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이 사건에서 성종 정치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성종의 강점은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고 완벽한 결정을 내린 데 있지 않았다. 서로 다른 주장이 충돌할 때 추가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판단을 다시 조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비판에도 국왕이 정한 한계가 있었다

성종이 홍문관과 대간의 의견을 들었다고 해서 모든 비판을 허용한 것은 아니다. 남효온은 세조 때 왕후의 지위를 잃은 현덕왕후와 소릉을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현덕왕후는 단종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소릉 복위 요구는 단순한 왕실 의례 문제가 아니었다. 세조가 단종과 그 주변을 처리한 정치적 정당성, 그리고 세조 이후 이어진 왕위 계승의 명분까지 건드릴 수 있는 요구였다. 성종은 남효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례는 성종이 신하의 비판을 무제한으로 허용한 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기존 대신의 비리나 행정 운영을 비판하는 의견은 국정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정통성과 자신의 왕위 계승 기반을 흔드는 문제에는 분명한 한계를 뒀다. 따라서 성종 시대의 언론 활성화를 현대적인 표현의 자유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국왕 중심의 정치질서 안에서 허용됐다. 무엇을 논의할 수 있고 어떤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사람도 국왕이었다. 성종은 비판을 통치에 활용했지만, 비판이 왕권의 근본을 공격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정보가 들어오는 통로가 많아도 판단은 왕의 몫이었다

여러 의견을 듣는 것만으로 좋은 정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신하들은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숨긴 채 국가의 원칙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할 수도 있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정보를 듣는 능력뿐 아니라, 그 정보가 누구의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이었다. 성종이 경연과 언론기관을 활용한 것은 국왕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범위를 넓혔다. 하지만 어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누구를 처벌할지는 여전히 성종이 결정해야 했다. 이 점에서 성종의 정치는 제도가 자동으로 움직인 결과가 아니었다. 『경국대전』과 홍문관, 경연과 대간이 존재해도 국왕이 불편한 비판을 모두 막아버린다면 제도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왕이 모든 신하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국정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성종 시대의 안정은 비판이 없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 주장이 국왕에게 전달되고, 국왕이 그 가운데 일부를 받아들이고 일부를 거부하는 과정이 반복됐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성종 이후 같은 제도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성종 시대에 중앙으로 진출한 새로운 관료들은 기존 공신과 대신의 특권을 계속 비판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은 성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연산군 시대에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많은 관료가 처벌됐다. 그러나 사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성종의 사림 등용이 잘못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화에는 연산군의 판단과 왕권 운영, 대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왕실 문제와 언관들의 비판 방식 등 여러 원인이 작용했다. 후대 국왕과 정치세력이 내린 선택을 성종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같은 언론기관과 정치적 갈등도 국왕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종은 비판을 국정에 필요한 정보로 받아들이고 다시 판단하는 경우가 있었다. 반면 다음 시대에는 신하의 비판이 국왕의 권위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숙청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 차이는 제도만으로 정치적 안정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판을 전달하는 통로가 마련돼 있어도, 국왕이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토론의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처벌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성종을 비판을 통치의 자원으로 활용한 왕으로 본다

성종을 조선을 완성한 위대한 군주라고 평가하면 그의 업적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은 『경국대전』 편찬이 세조와 예종 시대부터 이어졌다는 사실과 수많은 관료의 역할을 가릴 수 있다. 반대로 성종이 기존 정치세력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정치를 실패로 평가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가치관의 충돌은 한 명의 왕이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성종의 정치적 능력을 신하의 비판을 억누르지 않고 국왕의 판단에 필요한 정보로 활용한 데서 찾는다. 성종은 기존 공신과 원로 대신들의 경험을 계속 활용했다. 동시에 홍문관과 대간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공간도 유지했다. 경연을 통해 여러 관료의 의견을 들었고, 정치적 사건이 벌어졌을 때 추가적인 조사와 논의를 거쳐 자신의 첫 판단을 바꾸기도 했다. 그렇다고 성종이 모든 비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왕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에는 명확한 한계를 뒀고, 언론관을 처벌하거나 비판을 제지한 사례도 있었다. 성종에게 비판은 국왕의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권리가 아니라, 국왕이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허용한 정치적 기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성종을 오늘날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한 군주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내가 말하는 ‘비판을 통치의 자원으로 활용한 왕’이라는 평가는 역사학계의 확정된 정설을 소개하는 문장이 아니다. 성종 시대의 제도 운영과 사건 처리 과정을 바탕으로 내린 개인적인 해석이다.

 

좋은 왕은 처음부터 모든 답을 아는 왕이 아니다

성종 시대의 정치는 갈등이 없는 정치가 아니었다. 기존 공신과 대신들은 자신들이 쌓아 온 권력과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새롭게 진출한 관료들은 이들의 특권과 잘못을 비판했다. 국왕은 서로 다른 보고와 주장 가운데 무엇이 사실인지 판단해야 했다. 성종이 만든 것은 모든 신하가 같은 생각을 하는 조정이 아니었다. 홍문관과 경연, 대간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이 왕에게 전달되는 정치였다. 신하들은 국왕과 대신을 비판했고, 성종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했다. 때로는 첫 판단을 바꿨고, 왕실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비판에는 선을 그었다. 성종의 강점은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데 있지 않다. 자신과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을 곧바로 반역이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만 보지 않고, 통치에 필요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국왕이 모든 답을 혼자 알고 있다고 믿는다면 신하의 비판은 불필요해진다. 그러나 왕 역시 잘못된 보고를 받을 수 있고, 첫 판단에서 실수할 수 있다. 성종 시대의 정치는 왕이 신하의 말을 많이 들었다는 사실보다, 그 말을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데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통해 평가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성종을 갈등을 완전히 해결한 왕이나 조선을 혼자 완성한 군주보다, 비판과 다른 의견을 국왕의 통치 안으로 끌어들인 왕으로 평가하고 싶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성종대의 정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홍문관의 설치와 기능」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국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문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효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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