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고종은 외세의 압박 속에서도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군주로 그려진다. 일본에 맞서 비밀리에 움직이고, 제한된 권한 안에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모습이 비교적 선명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따라가면서는 안타까움보다 답답함이 더 크게 남았다. 특히 외교권을 빼앗긴 뒤에야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한 헤이그 특사를 보며, 고종의 대응은 왜 상황보다 늦었는지 생각하게 됐다. 역사를 읽다 보면 고종은 국가의 장기적인 위기보다 눈앞의 궁중 권력관계에 더 얽매였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때로는 조선이 무너지는 일보다 흥선대원군과 다시 충돌하는 일을 더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이는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의 선택을 살펴보며 느낀 개인적인 인상이다.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시작된 통치
고종은 1863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기에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주도했고, 고종은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난 뒤 친정을 시작했다. 강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 왕이 된 경험이 고종의 성격과 판단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친정 이후에도 대원군은 정치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임오군란 때 다시 권력의 중심에 등장했고, 청군에 의해 압송된 뒤에도 고종과 왕비 세력이 계속 경계해야 할 정치적 존재로 남았다. 고종의 통치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국내의 여러 정치 세력뿐 아니라 청·일·러시아를 비롯한 외세 사이에서도 균형을 잡으려 했다. 한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다른 세력의 힘을 빌려 견제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당장의 위기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일관된 기준을 세우기보다, 정세가 바뀔 때마다 의지할 상대를 바꾸는 통치로 이어질 위험도 있었다.
대한제국과 외세 균형 전략
고종을 나라가 무너지는 동안 손을 놓고 있던 군주로만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대한제국 정부는 양전 사업과 상공업 진흥, 군제 정비 등을 추진하며 자주독립 국가의 기반을 갖추려 했다. 1899년에 반포된 대한국 국제는 군 통수권과 법률 제정권, 관료 임면권, 외교권 등 강한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고종에게 국가를 바꾸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제의 권한을 법으로 강화한 일이 곧 국가의 실제 역량과 자주권 강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황제권이 강해질수록 중요한 결정도 고종에게 집중됐다. 그만큼 개혁의 방향과 결과에 대한 책임도 커졌다. 국가 운영의 권한을 손에 모았다면, 위기가 심해지기 전에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외교에서도 비슷한 한계가 나타났다. 군사력이 부족한 조선과 대한제국이 열강 사이의 균형을 이용하려 한 것 자체는 비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약소국이 한 강대국의 독점을 막기 위해 다른 국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한 생존 전략이었다. 문제는 외교를 뒷받침할 국내의 힘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외국은 대한제국의 독립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했고, 더 유리한 협상 상대가 나타나면 언제든 태도를 바꿀 수 있었다. 다른 열강의 힘을 빌리는 동안 군사력과 행정 체제, 안정적인 개혁 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면서 외교가 실패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수단도 줄어들었다.
외교권을 잃은 뒤 선택한 헤이그 특사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승인하지 않았고, 국외에 친서와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다.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특사들의 목적은 을사늑약이 황제의 동의 없이 강제로 체결됐음을 밝히고,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사들은 대한제국의 공식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본의 방해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열강의 이해관계였다. 미국·영국·러시아 등은 1905년을 전후한 여러 합의와 조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용인하고 있었다. 특사들은 각국 대표와 언론인을 만나 대한제국의 상황을 알렸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며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남겼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열강의 공식적인 지원을 얻거나 을사늑약을 무효로 만드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대한제국의 주권보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중요하게 여긴 국가들이 입장을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헤이그 특사는 왜 너무 늦은 대응이었을까
헤이그 특사 파견은 고종이 국권 회복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외교권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일본의 강압을 알리기 위해 남아 있던 통로를 찾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대응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의 해외 공관은 폐쇄됐고, 통감부는 외교를 넘어 내정까지 장악해 가고 있었다.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공식적으로 움직일 외교 통로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외교권을 잃은 국가가 국제회의에 대표를 보내 주권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헤이그 특사의 구조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일본의 침투가 본격화되기 전에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해서 국권을 지킬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당시 국제 정세는 대한제국에 지나치게 불리했고, 일본의 침략 의지도 분명했다. 그러나 결과를 바꾸기 어려웠다는 사실이 이전의 모든 판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외교와 군사, 행정 개혁을 더 일찍 일관되게 추진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상황이 돌이키기 어려워지기 전에 더 많은 선택지를 유지했어야 한다는 책임은 남는다. 헤이그 특사의 실패는 특사들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에 호소할 힘과 통로를 대부분 잃은 뒤에야 그들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겼다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무너지던 조선과 고종의 책임
헤이그 특사 파견이 알려지자 일본은 이를 고종을 몰아내는 구실로 이용했다. 고종은 1907년 강제로 퇴위했고 순종이 즉위했다. 이후 일본은 정미 7 조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내정 장악을 강화하고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이 헤이그 특사 때문에 새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이미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고, 특사 파견은 준비된 침탈을 확대하는 명분으로 이용됐다. 따라서 일본의 침략 책임을 고종의 특사 파견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조선이 무너진 원인도 고종 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았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국가 운영의 취약성과 정치적 혼란이 누적돼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에 맞서기 어려운 조건에 놓여 있었다. 일본의 침략과 이를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묵인한 열강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고종을 시대의 피해자로만 평가할 수도 없다. 그는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강한 권한을 추구했고,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릴 위치에 있었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언제,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지도자의 책임으로 남는다. 나는 고종이 조선을 혼자 망친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무너지던 조선에 가해진 ‘마지막 한 방’이라고 표현한다면, 몰락의 유일한 원인이었다는 뜻도 아니다. 이미 약해진 나라가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기 전에 남아 있던 선택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책임이 그에게도 있다는 의미다. 고종의 가장 큰 문제는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결정을 미뤘고, 움직였을 때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고종」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한제국과 광무개혁」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고종의 국권 회복 노력과 강제 퇴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헤이그 특사 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헤이그특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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