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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씨름〉은 현실을 그대로 옮긴 그림일까: 익숙했던 단원을 다시 보다 나는 안산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라는 이름은 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접해 온 익숙한 이름에 가깝다. 김홍도미술관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고, 김홍도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경험도 있다. 학창 시절에는 미술관 옆 공원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해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 당시에는 그림을 자세히 분석하기보다 친구들과 공원에 모여 종이를 펼치고 무엇을 그릴지 고민했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김홍도가 너무 익숙했기 때문인지 그의 그림 속 인물이 어디에 서 있고, 어떤 방향을 바라보며, 주변의 빈 공간이 왜 남아 있는지까지 세세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 〈씨름〉을 다시 보면서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이 그림은 조선 사람들이 씨름하는 .. 2026. 7. 25.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지킨 것과 백성이 치른 값 병자호란은 흔히 명분과 현실의 대결로 설명된다. 끝까지 청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척화파와,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화의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주화파의 논쟁이 중심에 놓인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쟁을 계속할지 항복할지 결정할 권한은 국왕과 조정에 있었지만, 그 결정으로 가장 먼저 목숨과 생활을 위협받은 사람은 성을 지키던 군사와 전쟁터에 남겨진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자호란에서 인조의 책임을 평가하려면 그가 어떤 명분을 내세웠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상황이 변하는 동안 누구의 위험이 커졌고 누가 그 위험을 감당했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인조에게 항복은 외교적 후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인조는 1623년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이 명나라의.. 2026. 7. 20.
조광조의 네 가지 개혁안: 도덕과 제도를 함께 바꾸려 한 국가 구상 요즘 온라인에서는 법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거나 암묵적인 규칙을 무시하는 사람을 ‘○○ 빌런’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런 행동은 법으로 처벌할 문제는 아니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준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불쾌하게 느끼는 모든 행동을 법과 제도로 금지할 수도 없다. 나는 도덕을 법이 모두 규정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형성한 합의와 배려라고 생각한다. 조광조의 개혁안을 살펴보면서 국가가 사람의 도덕과 생활 태도까지 다룰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조선은 왜 사람의 덕을 국가 운영의 문제로 보았을까조광조가 추진하거나 중요하게 여긴 여러 개혁 가운데 현량과, 향약 보급, 소격서 폐지, 위훈 삭제는 그의 국가 구상을 잘 보여준다. 현량과는 관리 선발, 향.. 2026. 7. 15.
중종은 왜 자신이 발탁한 조광조를 제거했을까: 위훈 삭제가 바꾼 왕과 신하의 관계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중종은 조광조를 중요한 자리에 등용했고, 그의 개혁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유배 보냈고, 결국 사약을 내렸다. 흔히 이 사건은 조광조의 개혁에 반대하던 훈구 세력이 중종을 속여 벌어진 일로 설명된다.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한 왕이 모함에 넘어가 유능한 개혁가를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훈구 세력의 공격과 정치 공작이 조광조의 몰락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광조를 직접 등용하고 그의 개혁 과정을 지켜본 중종이 아무런 판단 없이 훈구 세력의 주장만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조광조의 등용과 제거가 모두 중종의 불안정한 통치 기반과 연결돼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종에게 조광조는 .. 2026. 7. 8.
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권력 장악까지 생각했을까 이성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위화도 회군이다. 나는 이 사건을 무리한 요동 정벌을 막기 위해 이성계가 군대를 돌린 사건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시 장마가 계속되고 군량과 질병 문제가 있었으니, 병사들을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결정이었다는 설명도 충분히 이해됐다. 그런데 회군 전후의 과정을 다시 살펴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정말 전쟁을 피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이성계는 왜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대규모 군대를 개경으로 돌렸을까? 나는 이성계가 당시부터 조선을 세우고 왕이 되겠다는 계획을 모두 세워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정치적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회군은 단순히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었다. 실패하면 반역자로 몰릴 수 .. 2026. 7. 6.
성종은 신하의 비판을 어떻게 통치에 이용했을까: 홍문관과 경연이 만든 정치 왕이 모든 일을 직접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특히 조선처럼 넓은 행정조직을 운영하는 국가에서 국왕은 신하들이 올리는 보고와 상소를 통해 현실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왕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한 대신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의견에 치우친다면 국왕의 판단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성종 시대의 정치를 살펴볼 때 『경국대전』의 완성이나 사림의 등용만큼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서로 다른 의견과 비판이 국왕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성종은 홍문관과 경연을 활용해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고, 대간의 비판도 국정 운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모든 비판을 허용하거나 신하들에게 결정권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성종은 여러 의견을 들은 뒤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디에서 선을 그을지 직접 .. 2026.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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