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5 정약용은 왜 『목민심서』를 부임부터 해관까지 배열했을까: 책의 구조로 읽는 수령의 책임 『목민심서』의 첫 번째 편은 수령이 임지에 도착한 뒤 처리할 세금이나 재판이 아니다. 수령으로 임명돼 길을 떠나고 관아에 들어가는 과정을 다룬 부임이다. 마지막 편도 조세·군사·형벌과 같은 행정 업무가 아니다. 임기가 끝난 수령이 관직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다룬 해관이다. 정약용은 이 두 편 사이에 자신을 다스리는 율기, 공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봉공, 백성을 돌보는 애민을 놓았다. 그다음에는 인사·재정·의례·군사·사법·토목에 해당하는 여섯 편을 배치했고, 흉년과 재난에 대응하는 진황을 별도로 다뤘다. 이 목차는 수령이 평소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관직을 받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엇을 경계하고 어떤 일을 책임져야 하는지를 순서대로 보여준다. 나는 『목민심.. 2026. 6. 3. 숙종의 환국정치: 승자도 안전하지 못했던 이유 1680년 경신환국에서는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허적·윤휴·유혁연 등 남인의 주요 인물들이 죽었고, 여러 관료가 중앙 정치에서 축출됐습니다. 1689년 기사환국에서는 상황이 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으며, 원자 책봉에 반대했던 송시열은 유배된 뒤 사사됐습니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남인은 다시 정권을 잃었습니다. 환국 이후 진행된 국문과 처벌 과정에서 민암과 이의징이 사사됐고, 권대운·목내선·김덕원·민종도·이현일 등 여러 남인계 인물이 유배됐습니다. 14년 동안 집권 세력이 세 차례 뒤바뀌었습니다. 숙종의 환국은 흔히 특정 붕당의 독주를 막고 왕권을 강화한 정치로 설명됩니다. 실제로 숙종은 어느 한 붕당에 계속 의존하지 않았고, 정국의 주도.. 2026. 5. 28. 영조의 탕평책: 붕당의 공존보다 국왕의 통제에 가까웠던 정치 1728년, 영조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세력은 충청도 청주성을 점령하고 영조의 왕위 계승 정당성까지 부정했다. 붕당의 대립은 조정 안에서 관직을 두고 다투는 수준을 넘어 왕의 자리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위협이 됐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을 내세웠지만, 무신란 이후에는 정치 세력을 국왕 아래에서 조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붕당 간의 화합보다 자신의 정통성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탕평책은 붕당을 없앤 정책이었을까, 아니면 붕당을 국왕의 통제 아래 두려 한 통치 방식이었을까. 영조에게 붕당은 왜 위험한 존재였을까영조는 경종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올랐지만.. 2026. 5. 23. 장희빈에게 실제로 물을 수 있는 책임: 실록과 악녀 서사 사이 1689년 장씨를 왕비로 올리기로 결정한 사람은 숙종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690년에는 정식 왕비 책봉례가 거행됐습니다. 1694년 장씨의 왕후 지위를 거두고 다시 희빈으로 낮춘 사람도 숙종이었습니다. 1701년 인현왕후를 모해했다는 죄를 물어 자진을 명한 사람 역시 숙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이 정치적 변화의 중심인물로 숙종보다 장희빈이 더 강하게 기억됩니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가 된 뒤,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고 궁중과 조정을 흔든 악녀로 묘사돼 왔습니다.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인현왕후의 폐위와 복위, 1701년 무고의 옥까지 장희빈의 욕망에서 시작된 사건처럼 설명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록에서 확인되는 숙종의 결정과 장희빈 본인의 행동을 구분해 보면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 2026. 5. 23. 명성황후의 악녀 이미지는 무엇을 감추었나 명성황후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단서는 그녀를 묘사한 말보다 그 말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바뀌었는가에 있다. 일본의 관변 언론이었던 『한성신보』는 처음부터 명성황후를 일관되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개항과 개화정책을 일본의 도움으로 이룬 변화라고 선전하던 시기에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개국에 우호적인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간섭 이후 조선 왕실이 러시아에 접근하고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구상이 흔들리자 논조가 달라졌다. 명성황후는 민씨 일족의 부패와 매관매직, 무속 신앙을 조종하는 인물로 부각됐다. 을미사변 전후에는 국왕의 판단을 흐리고 조선을 혼란에 빠뜨린 존재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훗날 한국의 뮤지컬과 드라마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명성황후는 일본에 맞서 조선을 지.. 2026. 5. 21. 사도세자의 비극에서 사라진 사람들 사도세자와 기록1762년 윤5월 13일의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짧지만 무거운 내용이 등장한다. 세자의 병이 심해진 뒤 발작할 때 궁비와 환시를 죽였고, 정신을 차린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는 기록이다. 궁비는 궁중에서 일하던 여성 종사자를, 환시는 환관을 가리킨다. 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세자의 폭력으로 궁중 사람들이 실제 피해를 봤다는 사실이다. 다만 피해자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그들의 이름과 구체적인 삶이 어떠했는지는 대부분 확인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를 구분하려 한다. 첫째, 사도세자에게 심각한 병증과 폭력적 행동이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둘째, 피해자들의 이름과 삶이 거의 남지 않은 이유에는 왕.. 2026. 5. 17.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