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으로 한글을 입력하는 일은 너무 익숙해서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음과 모음을 누르면 머릿속의 말을 곧바로 글로 옮길 수 있다는 사실도 당연하게 느꼈다. 그러다 우연히 중국어 키보드를 보면서 언어마다 말을 문자로 바꾸는 방식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지금 내가 사용하는 문자가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필요성을 느끼고 새롭게 만든 체계라는 점을 생각하게 됐다. 세종은 백성에게 한자를 더 열심히 배우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새로운 문자까지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을까?

말은 있었지만 그 말을 적기 어려웠던 사회
조선 사람들은 일상에서 우리말을 사용했지만, 국가의 문서와 학문은 한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두와 구결처럼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한자를 먼저 익혀야 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었다. 문제는 백성에게 언어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기록할 문자가 없다는 데 있었다.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직접 글로 남기기 어려웠다. 국가의 명령이나 지식을 접할 때도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의 설명에 의존해야 했다. 말은 할 수 있어도, 그 말을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전달할 방법은 제한돼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1443년에 새로운 글자 28자를 만들었고, 1446년에는 글자의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을 펴냈다. 세종이 직접 쓴 서문에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만으로는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애민 정신만으로 훈민정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애민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세종 자신도 새로운 문자를 만든 목적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훈민정음만이 아니라 흉년 대책과 농업·의학 지식의 정리에서도 백성의 생활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훈민정음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으로 만들어진 문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종이 왕이 됐을 때 조선은 건국된 지 20여 년이 지난 나라였다. 제도는 점차 정비되고 있었지만, 세종은 왕실 내부의 권력투쟁과 새로운 국가 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겪으며 성장했다.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가 전하려는 명령과 지식을 백성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백성의 사정도 국가에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세종이 이 과정에서 언어와 문자의 차이를 행정의 걸림돌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배려하는 마음과 국가 운영을 안정시키려는 현실적인 필요가 함께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진 것이다. 훈민정음이 한문을 즉시 없애거나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문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국가 행정과 학문의 중심으로 남았다. 새로운 문자는 기존 체계를 모두 버리는 수단이라기보다, 한문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의사소통의 빈틈을 보완하는 도구에 가까웠다.
최만리의 반대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있다. 그의 반대를 백성이 글을 배우는 것을 두려워한 지식인의 기득권 의식으로만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만리 등의 상소를 살펴보면 반대 이유는 그보다 복잡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 속에 있었다. 중국의 문자와 제도를 따르는 것은 단순히 외국 문화를 모방하는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 문명국가로 인정받는 방식과 연결돼 있었다. 최만리 등은 조선이 별도의 문자를 만들면 중화의 질서에서 벗어나 주변 국가들과 같은 위치로 보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쉬운 문자가 널리 사용되면 관리와 학자들이 한문과 성리학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형사 사건의 억울함은 문자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공정성에 달렸다는 반론과, 충분한 논의 없이 새 문자를 추진했다는 절차상의 비판도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과도한 걱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위치를 생각하면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이 단순한 문화 정책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어에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공동체의 정서가 담긴다. 그 언어를 독자적인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문화적으로도 큰 변화다. 최만리 등은 그 변화가 명나라 중심의 질서와 충돌할 가능성을 걱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명나라가 훈민정음 창제를 실제로 문제 삼거나 조선에 제재를 가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관료들이 외교적 위험을 우려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국제적 문제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세종은 이러한 우려보다 조선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불편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조선의 현실에 맞는 답을 내놓은 것이다.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 무엇이 달라질까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고 조선의 신분 질서가 곧바로 무너진 것은 아니다. 문자 보급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교육과 기록의 기회도 신분과 생활환경에 따라 달랐다. 한문을 익힌 지식층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정치와 학문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를 오늘날의 보편적 평등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문자의 등장은 중요한 가능성을 만들었다. 문자는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지 않는다. 왕이 배우는 자음과 노비가 배우는 자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배울 기회는 달랐지만, 일단 문자를 익히면 자신의 말을 글로 옮길 수 있다는 원리는 누구에게나 같았다. 말은 그 자리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글은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읽힐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말할 수 있는 범위뿐 아니라 기억되고 전달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뜻이다. 한문을 배운 소수와 기록을 대신해 주는 사람에게 의존하던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말을 직접 적을 가능성이 생겼다. 이것만으로 권력관계가 즉시 바뀐 것은 아니지만, 지식과 표현을 독점하던 구조에는 분명한 틈이 생겼다.
훈민정음은 누구를 위한 문자였을까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애민 정신과 국가 운영 가운데 하나만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백성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마음도 있었고, 국가의 명령과 지식이 제대로 전달돼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다. 백성의 편리함과 통치의 필요는 서로 반대되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문자 안에서 함께 작용했다. 나는 훈민정음의 가장 큰 의미가 한글이 과학적이거나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사실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에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 공동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담긴다. 그것을 글로 남겨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면 언어는 그 순간을 넘어서는 힘을 갖게 된다. 세종은 기존 문자를 배울 기회를 조금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의 말을 적을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이전보다 넓어질 가능성이 생겼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편리하게 만든 문자이면서, 지식과 표현을 소수만이 독점하던 권력의 경계에 틈을 만든 문자였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 창제 기사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의 상소와 세종의 반박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세종어제훈민정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훈민정음 반대 상소와 세종의 반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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